낮잠

하루 중 가장 짜릿한 순간 하나를 꼽는다면, 

점심을 먹은 이른 오후 무거워진 눈꺼풀에 그만 백기를 드는 찰나이다.

창문은 살짝 열어둔 채 햇살을 받으며 솔솔 부는 바람과 함께 잠에 빠져든다.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터라 입은 옷 그대로, 침구도 제대로 펼치지 않고 몸뚱이만 살포시 빈 공간에 뉘인다. 

잠에 빠져야 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눈을 감기까지 그 짧은 순간 동안에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며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

'얼마나 깊게 자도 되는지, 혹시나 늦게 일어나면 안되는 약속이나 데드라인을 위해 알람을 맞춰야 하는지, 지금 자도 방금 먹은 점심이 소화가 잘 될런지, 조금 더 쉽게 일어나기 위해 두 다리를 몽땅 침대 위에 올리고 자도 되는지, 아니면 종아리를 침대 밖으로 내리고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할지.'

그리고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일을 책임을 전가해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말 한마디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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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은 빠지는 시간대에 따라 매력이 달라진다. 

전문가들은 낮잠은 오후 네 시 이전에 자야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늦은 오후에 빠지는 초저녁 잠은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잠의 형태다.

보통 초저녁에 잠이 오는 경우는 근래에 잠을 많이 못잤거나, 몸 컨디션이 살짝 좋지 않거나, 낮잠을 잘 시간이 없었거나, 저녁밥 생각할 힘조차 없이 피곤한 상태다. 대여섯 시쯤에 잠에 들어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면 일고 여덟 시가 넘는다. 너무 피곤할 때는 중간중간에 깼다가 더 자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다가 아홉 시가 넘은 시각에 겨우 일어나기도 한다.

초저녁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 개운함은 말로 못해 새로 태어난 듯하다. 정신은 초롱초롱하고 기분은 베이비파우더로 샤워한 것처럼 몽글몽글한게 마치 애기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잠을 자는데 시간을 썼는데도 이상하게 하루가 더 길어긴 느낌이다. 상쾌한 마음으로 일어나서는 다음 잠을 자기 전까지 청소, 운동, 급한 일 처리를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좋아하는 영상물이나 라디오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왠지 초저녁 잠을 자는 날에는 남은 시간을 좋은 걸로만 채우고 싶다. 초저녁 잠을 자더라도 밤 잠을 자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suziosaurus, 10월 23일의 저녁 노을

 

 

초저녁 잠이 주는 상쾌함과 개운함을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이는 그만큼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소중함이 배가 된다. 어쩌면 열정적인 하루를 보내고, 그전의 잠을 참아온 나에게 보상처럼 선물로 주어진 게 아닐까 한다. 

 

@하루 한 편 글쓰기
2020년 10월 24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