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글쓰기의 필요성

@suziosaurus / Bird by bird

지금까지 얼마나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구나,를 자각한 건 대학교 필수 과목이었던 논리적 글쓰기 시간이었다.

아마도 첫 번째 주 과제가 자유 주제 글쓰기였다.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서 노트북을 다리 위에 올려놓고 글쓰기를 시작하려는데,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자유'

자유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던가. 나는 여태껏 누군가가 정해진 주제에 대해서,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에 따라서만 살고 있었구나. 그 당시 능동적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고작 장학금이나 인턴쉽을 지원할 때 썼던 자기소개서뿐이었다. 해봤자 비슷한 자기 자랑의 글들. 지난 학기에 저장해두었던 자기소개서를 다시 꺼내 들어 가이드라인으로 잡고 수정을 했던 그런 글들 뿐이었다.

'나는 공대생이니까 글 좀 못 쓰면 어때'

공대생이라는 이유로, 글을 못써도 된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 나름 능동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배신감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쓸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주제, '나의 가치관 변화'에 대해 글을 정리하고 과제 제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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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번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은 J라는 분이 열정에 찬 목소리로 교수님께 말했다. 자유 글쓰기, 너무 재미있는 활동이었다고. 

'띵~'하는 종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자유 글쓰기에 저렇게 열정적일 수 있구나. 대단하다.

수업이 끝나고 그분께서 내가 올렸던 글을 읽었다고, 공감이 되었다고 관심을 가지고 말을 붙여주셨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집에 돌아와 그분의 글을 찾아 읽어봤다. 나와는 다른,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글이었다. 아주 부끄러웠다. 그리고 다시 읽어본 내 글은 쓰레기 같았다. 그분의 칭찬은 그냥 말을 걸기 위한 관심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능동적인 생각을 하고 살아야 겠다는 걸 깨달은 게 바로 그때였다. 나는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교수님과 선생님 그리고 사회에 맞춰둔 틀 안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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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사실 부끄럽게도 그 사이에는 바쁘다는 핑계, 그리고 나는 어차피 글로 먹고 살지 않을 거니까 하는 핑계를 대며 제대로 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그러다 우연하게, 슬럼프가 크게 한번 찾아왔다.

슬럼프로 자아를 탐구하는 시간들을 보내던 중, 문뜩 명확한 자기 표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별거 없는 것도 글쓰기나 발표 능력에 따라서 '괜찮아 보일' 수 있구나를 깨달았다. 그리고 글을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블로그에 하나씩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 달이라는 기간동안 최대한 매일 글을 쓰려고 시도했고, 놀랍게도 한 달만에 글의 퀄리티에는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높은 위치에서 더 높이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밑바닥, 아니 깊은 땅굴에서 바닥으로 올라가는 데는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더 놀라운 건, 문장력의 발전보다도,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길러졌다.

글을 쓰려면, 한 주제 대해서 오랜 시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이 필요하다. 그 주제에 대한 나의 명확한 의견이 필요하고, 의견을 정리하고, 고치고, 문맥에 맞게 다듬어야 비로소, 그래도 읽을 만한 글이 탄생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상황이나 현상, 또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내 주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분야 주장에 생기니, 점점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나의 관점이 생기고, 관심 분야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나의 정체성도 뚜렷해졌다.

글을 쓰는 건 나에 대해 탐구해 나가는 과정이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누군지가 뚜렷해지고,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전의 내가 써둔 글을 읽어보면, 이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며 한번 놀라고, 내 자신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이 어색하고,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하다.

<대화의 희열> 아이유편에서, 패널인 김중혁 작가님이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이, 17세의 나와 26세의 나는 같은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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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연속적인 자아가 아니라 단속적인 자아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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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고 공감되는 발상이었다. 

사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 모른다. 한 몸뚱이 안의 개체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구성이 바뀌고 아예 다른 자아로 변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라는 몸뚱아리에 찾아온 여러 자아들을 이렇게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짧은 만남이 조금 아쉽지 않을까? 이번 만남을 끝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의 나를, 그의 흔적을 조금씩 남겨두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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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가면서 나의 정체성을 단단히 그려나갈 수 있기에, 그리고 나를 거쳐가는 여러 자아들을 그냥 떠나보내기에는 조금 아쉽기 때문에.

그게 내가 생각하는 능동적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다.

 

@하루 한 편 글쓰기
2020년 10월 16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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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suziosaurus (Bird by bird)

www.youtube.com/watch?v=RZ3W1XERm4A&t=1018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