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그리고 할머니

'엄마, 나도 갑자기 내일부터 학교 안 가게 됐어.'

2주 전 목요일 저녁에 엄마랑 카톡을 했다. 

코로나 19로 한국에서는 이미 사회적 거리 두기의 캠페인이 나오고 전 국민이 예방 차원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지 오래지만, 유럽 국가는 심각성을 인지 하지 못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사망자가 며칠 만에 몇백이 넘어가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도 슬슬 코로나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니 드디어 총리가 대비책 발표를 했다.

'생필품 좀 사놔. 휴지도 미리 좀 사서 준비해두고. 나중에 사람들 사재기하면 구하기 힘들 거야. 비상 식품도 사놓고. 거기는 파스타면이랑 소스 같은 거 사둬. 또 뭐가 좋을까?'

엄마는 걱정이 많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파스타면이랑 소스 같은 비상식량은 나도 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휴지는 의아했다. 집에 한 줄 정도의 두루마리 휴지가 남아있어서 이 주 정도는 버티겠지 하고 엄마의 말을 흘러 넘겼다.

다음날 저녁때가 되어 장보러 마트에 갔는데 어라, 휴지가 없다. 휴지뿐만 아니라 항상 마트에 꽉꽉 차있던 파스타면, 스파게티 소스, 시리얼, 온갖 통조림 음식, 쌀, 냉동식품, 빵 등 신선 식품을 제외한 모든 항목들이 가판대에 많아야 한 두 품목 씩 굴러다녔고 나머지는 다 나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아르바이트생들이 수량을 채우는 족히 사람들은 잽싸게 음식을 집어갔다. 

하루 만에 상황이 바뀌었다.

정부에서는 음식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 사재기를 그만하라 경고했지만 사람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텅텅 비어있는 마트에 이러다 정말 음식을 못 먹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나도 면 하나 더, 소스 하나 더를 챙겼다. 휴지는 매일 마트를 방문하던 4일 차에 겨우 한 팩 살 수 있었다. 휴, 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정말 이러다 화장실도 아껴가야 할 뻔했다. 역시 엄마 말은 잘 새겨 들어야 한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다. 

2주가 지난 아직까지 마트에는 휴지가 잘 없다. 근 4일째 밖을 안나가 지금 상황은 잘 모르겠다. 지난주에 한번 마트에 갔다가 몇 개 눈에 보이길래 휴지 한 롤을 집어왔다. 보일 때 사두지 않으면 필요할 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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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외할머니 댁에 가면 그렇게 휴지가 많았나 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두 분에서 쓰시기엔 몇 년도 더 걸릴 거 같은 양이 항상 쌓여있다. 휴지뿐만 아니라 수건, 칫솔 치약, 심지어 유통기한이 몇 년 지난 샴푸 린스도 쌓여있다. 냉장고도 큰 거 두 대가 꽉 차있다. 청소를 안 한 게 아니라 가지런히 정리정돈 잘 된 상태로 비축되어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마 여섯 살이나 더 어릴 때, 한 번은 가족 여행을 갔다가 불꽃놀이로 폭죽이 터졌다. 그때 할머니가 귀를 막으며 엄청 놀라시며 심장이 벌렁 인다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아주 애기 때 6.25를 겪으셨다.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릴 때지만 트라우마가 남아있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놀라 하는 거에 나도 놀라서 아직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할머니 집에 쌓여있는 휴지들도 전쟁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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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오늘 아침 화장실을 갔다가 또 휴지 한 롤을 다 써서 든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하루 한 편 글쓰기 4일 차
2020년 3월 25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