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싶은 공간

'한 곳에 정착하고 싶다.'

.

역마살이 징하게 끼었는지, 어렸을 적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인턴, 봉사 활동 등으로 단기간 이동한 걸 제외하고, 오로지 '거주'를 목적으로만 총 세 개의 국가, 일곱 개의 도시를 옮겨 다녔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도 이사를 여러 번 했는데, 현재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내가 태어난 이후로 열두 번째 집이다. 나는 그 사이에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몇 번의 이사를 더 하게 됐다. 학부생 때도 보통 고학년이 되면 기숙사 연장 신청을 하여 한 기숙사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게도 나는 고학년이 되어 선배 그룹 (프락터) 활동을 하느라, 학교 룰에 따라서 계절마다 방을 옮겨야 했다. 그렇게 학부생 때만 세 개의 다른 기숙사 건물과, 기억에 남는 것만 최소 열 개의 다른 방을 옮겨 다녔다. 대학원은 해외로 유학을 오느라 국제적인 이사가 추가가 됐다. 아,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중국에서 홈스테이를 했어야 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기억에 남아있는 것만 해도 12+10+1+1 = 24 개의 다른 공간에서 살았다. 지금 내 만 나이가 24이니, 태어나서 평균 일 년에 한 번은 이사를 해왔던 것이다. 그것도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해야만 해서 말이다.

 

이사가 잦다보니 자연스레 실용주의자가 되었다. 물건을 하나 사도 나중에 이사할 때 짐이 된다는 걱정부터 든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 구매를 지양한다. 벼룩시장 구경이나 아기자기한 소품 구경을 좋아한다. 길을 가다가 소품샵이 있으면 들어가서 둘러본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도 한번 만져보고는 다시 자리에 놓고 나온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기숙사에도 딱히 인테리어용이라고 할만한 게 없다.

 

그러다가 2년 전 우연히 모델 송경아 님의 셀프 인테리어 집 투어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www.youtube.com/watch?v=QH96IrFuyCA&t=1176s

 

집안 구석구석에 그녀의 뛰어난 감각과 센스가 묻어난다. 무려 2016년 영상이지만 지금 다시 봐도 감탄만 나온다. 송경아 님이 다음으로 이사한 집과 세컨드 집 투어 영상도 너무 예뻐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구경했다. 이때 '내가 사는 공간'에 대한 나의 관념이 바뀌었다. 그리고 두 가지 생각을 했는데, 첫 번째는 '나도 나만의 좋은 공간에 살고 싶다'. 두 번째는 '그런 공간에서 살기 위해서는 돈은 물론이고 뛰어난 미적 감각을 갖춰야 한다'.    

 

유튜브의 순기능 중 하나는 랜선으로 뛰어난 감각을 가진 디자이너들의 집 투어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아니면 어떻게 그들의 집을 구경할 기회가 있을까! 집이라는 공간에 관심을 갖고부터는 간간이 Vogue Living에 올라오는 영상으로 간접 집 투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싶은 이상적인 공간에 넣고 싶은 것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태오 씨 한옥 집은 거대한 예술작품이었다. 내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었지만 영상을 보는 내내 '엄청나다'라는 단어 외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youtube.com/playlist?list=PLq8XCjXQKmFEf46rX1sYfNP4Lm2p0CbfV

Vogue Living

위 Vogue Living 영상 리스트에는 없는데 마크 테도의 한옥 집 구경도 추천한다!

 

---

 

며칠 전 친구 S를 중심으로 8명이 모여 영화 <소울> 비대면 감상회를 열었다. 오프닝으로 각자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간단하게 그려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공간에 살고 싶은지에 대해 머릿속으로만 구상해왔는데 이렇게 시각화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서 중요 요소는 크게 '집 안' '집 밖 환경' 그리고 '사람' -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뉜다.

 

내가 살고 싶은 공간!

 

그림 가운데에 보이는 큰 동그라미가 나의 집이다. 아기자기한 부엌과, 잠자기에 최적화된 작고 어둡고 아늑한 침실이 있다. 집에 거실이 두 개가 있는 게 특징이다. 거실 1에는 편안한 쇼파와 와이드 디스플레이, 그리고 요가 매트 등의 간단한 운동 기구가 있다. 평소에는 쉬거나 운동을, 불을 끄고는 영화 관람을 할 수 있다. 거실 2는 아이디어 룸이자 작업실이다. 카페 같은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있다. 한쪽 구석에는 페인트와 같은 미술 도구와 드라이버 같은 공구를 보관한다. 만능 작업실이다. 베란다에는 소소하게 바비큐 할 공간이 있다. 작지만 편안한 의자도 한쪽 옆에 놓여있다. 햇살을 받으며 커피 마시기에 좋다.

 

집은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도시이지만 너무 도심은 아닌 곳에 위치해있다. 심야 영화를 보고 집에 걸어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영화관이 있다. 창문 뷰에는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주짓수 도장이나 춤 혹은 밴드 연습실이 삼십 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식료품을 살 수 있는 마트는 걸어서 십 분 거리 내에 위치한다. 시장까지도 걸어서 이십 분 정도가 걸린다. 

 

가족이 사는 집은 도보로 10분 반경 안이다. 자전거로 10분 거리 내에 친구 세 명 정도가 살면 좋겠다.

 

어쩌다보니 '그림 그리기' 보다는 조건 나열하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오랜 기간동안 어떤 공간에 살고 싶은 지에 대해 생각해오다 보니 꽤나 만족하는 청사진이 그려졌다. 이제 어디에 살고 싶은 지 알았으니 남은 건 돈 모으기와 감각 키우기 밖에 없다! 지금 당장이 떠돌이 생활 중이기도 하고 너무 이상적인 게 아니냐,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더라. 구체적으로 그려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비슷하게나마 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글을 쓰려는데, 마침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아래의 영상이 떴다.

www.youtube.com/watch?v=BBV1NKBaxbY

 

 

 

 

위 영상에서 유현준 교수님은 우리나라 주거 형태를 국가 차원에서 다양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만의 이상적인 공간을 갖고 싶다'라고 쓴 위의 글의 맥락과는 맞지 않지만, 넓고 좁고를 떠나서 고층 아파트만 바라보는 획일화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관점에서는 결이 비슷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상적인 주거 방식을 충분히 꿈꿔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하겠다. 주어진 것에 끼워 맞추지 않고, 어떤 것이 필요한 가를 충분히 고민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게 꼭 '공간'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각각의 사회 구성원들이 현재 짜여진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목소리를 키우면 비로소 새롭고 다양한 문화를 형성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