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채우기 위한 맥주

그 무엇도 제대로 된 게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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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에 문제를 해결하느라 취침 시간이 늦어졌다. 늘 그렇듯, 공부나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칼로리가 높은 무언가로 입을 채운다. 늦은 밤인 데다가, 이미 속도 더부룩했다. 그렇게 목구멍으로 욱여넣은 칼로리바는 다음날 종일 퉁퉁부은 듯한, 아주 아름다운 기분을 선사해줬다. 수면 시간은 충분했는데도 머리는 멍-하고 몸은 찌뿌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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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시에 머신러닝 수업 중간발표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가 아닌 다른 조원이 발표를 맡기로 했다. 땡큐! 줌 미팅 카메라를 꺼두고 편히 들을 수 있겠다. 음, 그런데 친구야, 발표에 자신이 있다며! 평소에 과제를 열심히 하던 친구라서 발표도 잘할 줄 알았다. 웬걸, 우리가 한 것도 안 했다고 하고, 별 중요하지 않은 슬라이드에서 시간을 쏟아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조모임에서는 딱 1인분만 하자' 주의로 굳히려고 했는데, 또 만족 못하는 원래 성격 나온다. 기말 발표는 내가 한다고 해야겠다. 왜 나는 한 번도 조모임 버스를 타보지를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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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발표 실력은 둘째치고,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준비한 내용의 방향성이 완벽히 어긋났던 것이었다. 해오라는 것 그대로 맞춰서 해갔는데, 코치는 다른 걸 원하고 있었다. 같은 rubric을 보고, 여섯 개의 조 모두가 다른 범위와 내용을 준비해왔다. 이 정도면 코치 잘못 아닌가? 이번 학기 듣는 수업 중 가장 골 때리는 수업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우리 조 피피티가 제일 별로였고, 발표도 제일 별로였다. 내가 봐도 별론데 아, 이 수업 학점 망했다. 기말로 커버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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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끝나고 조원이랑 미팅을 했다. 다같이 문제 인지를 하고 방향성을 아예 틀기로 했다. 데드라인이 이틀하고 반나절 남은 리포트를 다시 써야 한다. 주말에 할 일 하나 더 추가요! 이미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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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끝내야지, 하고 적어둔 잡다한 일 중 제대로 한 게 하나 없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른 과목 과제를 시작하려는데 졸리다. 어제부터 몸이 무거운 게 피로로 이어진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시간은 뭐했다고 벌써 네시가 넘었다. 기분은 없다. 기분이 없는 이 기분은 뭐지? 처음 느껴보는 것 같다. 감정이 없는 무감정의 상태였다. 아 이럴 때 맥주를 마시는 건가, 맥주를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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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은 장보는 날. 졸린데 맥주도 살 겸 일찍 장을 보러 가기로 한다. 리갈 패드 한 장을 찢어서 일주일치 장 볼 리스트를 적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뭘 먹을까 이것저것 추가하느라 한 시간이 좀 덜 걸렸다. 그렇게 장바구니를 들고 밖을 나갔다. 오케이, 왼쪽 주머니에 지갑있구요! 지난 이주 연속 장 보러 나가서 마트까지 걸어갔다가 지갑이 없어서 헛걸음을 했다. 어, 그런데 방금까지 쓰던 쇼핑 목록을 두고 나왔네. 제대로 하는 게 뭐냐 너는! 그래도 귀찮으니까 그냥 마트로 간다. 맥주 한 캔만 잘 사 오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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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마트에는 술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일 년에 술을 마시는 빈도가 손에 꼽는, 술알못인 나에게는, 오히려 선택의 폭이 넓어 뭘 사야 할지 꽤나 난처한 일이다. 일단은 맥주 쪽으로 가서 캔 두 종류를 집어 들었다. 기준은 병 말고 작은 캔, 그리고 여섯 개 들이로 있는 거 말고 한 캔만 나와있는 거. 거의 큰 캔이거나, 병이거나, 여섯 개씩 묶여 있어서 남는 옵션이 몇 없었다. 맥주를 고르고 같이 먹을 바베큐맛 봉지 과자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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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집에 와서 보니 다행히 장보기 목록에 써둔 것들을 하나 빠짐없이 잘 사 왔다. (이거 하나 잘했네) 침대에 맥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앉았다. 작은 책상에 노트북을 올리고 볼 영화를 고른다. 오늘은 <올드보이>다. 맥주 한 모금을 마셨는데 달달하니 맛있다. 네덜란드의 하이네켄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고, 지금까지 여기 와서 유럽 맥주가 맛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기대하나 하지 않았는데, 이건 맛있다. '맛있다'는 감정을 느꼈다. 찾아보니 벨기에 맥주. 그래도 내 입맛은 국산인 듯. 테라는 못 이기지만 이 또한 아주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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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도 모르고 그냥 사온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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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레페 맥주와 과자와 올드보이로 금요일 밤을 보냈다. 반나절이라도 휴식을 주자고 합리화를 하면서, 글도 쓰지 않고 운동도 오랜만에 하루를 쉬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달달한 디저트나 영화나 예능이나 운동으로 풀어왔다. 그런데 스트레스라고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없는 하루에는 어떻게 감정을 불어넣을까 했더니, 그게 맥주였다. 이게 어른이 먹는 맥주의 맛이구나. 그 무엇도 제대로 되는 게 없는 날에는 맥주를 한 캔 따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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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가히 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