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치를 낮추는 것

'투둑... 투둑... 투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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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렸다.

금요일 저녁, 장바구니, 장 볼 리스트와 지갑을 챙겨서 나가는 길이었다.

방에서 암막 커튼을 치고 있었더니 미쳐 비가 오고 있는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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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침부터 흐릿흐릿했었구나. 아까 비도 왔었구나.'

깜박하고 있었네!

예상치 못한 빗방울을 마주했지만 그대로 마트로 향할 수 있었다. 이미 방수재질의 조거 팬츠와 운동화, 그리고 모자가 달린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요즘 교복처럼 입고 있는, 네덜란드 살이에 최적화된 착장이다. 이 정도의 약한 비쯤은 커버 가능하다. 눈앞을 가릴 정도의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장 보러 가기에 충분히 괜찮은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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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으로 돌아가서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나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먼저, '하, 또 비 오네' 하면서 기분이 확 처지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모자가 달린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거나,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나오거나, 아니면 기운 빠져서 장보기를 다음 날로 미루거나 - 셋 중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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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일 년 조금 넘게 살았다고 이렇게 적응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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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입는 옷부터가 그러하다. 햇살이 커튼을 뚫고 나올 정도로 날씨가 좋다던가, 기분이 찢어지게 좋다던가, 하는 날이 아니면, 언제든 비 맞을 준비가 된 옷을 입는다. 여기서 사는 동안 옷을 거의 사지 않았는데, 새로 산거라 해봤자 검은색 운동복이랑 검은색 점퍼랑 아주 기본 티셔츠뿐이다. 예쁜 옷을 사고 싶어도 어차피 날씨 때문에 입을 일이 거의 없기에, 오직 날씨 최적화, 실용 중심의 옷만 있다.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아서 가장 필요한 것만 두다 보니까, 이렇게 재미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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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 이상 날씨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며칠 연속 하루 종일 비바람이 불거나 하면 우울해지는데, 이건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비타민D를 챙겨 먹는다 해도, 이건 호르몬 문제라 내 해결 능력 밖 일이다.

다만, 예상치 못한 비를 맞이한다고 해서, 그 사실로 인해 기운이 다운되는 폭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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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가 원래 그런데, 뭘 바라겠어' 하고는,

이미 기대치가 낮을 대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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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치를 낮추면,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렇게,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고, 효율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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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비슷하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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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을 아주 조심스럽게 사귀는 편이다. 그래서 너무 처음부터 잘해주거나, 급하게 훅 다가오는 사람들은 부담이 되어 밀쳐내곤 한다. 보통은 조금 멀리서 지켜보고 탐색하는 기간을 가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에게 신뢰가 쌓이고 나와 resonate 된다면, 그제야 혼자만의 '친구' 서클에 위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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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크게 차이나지 않게 대한다. '친구'든 조금 가까운 '지인'이든. 하지만, 마음속에서 '친구'와 '지인'의 갭은 확연하다. 아주 까놓고 말해서, '지인'에게는 관심도 기대도 없다. 그 사람이 지금 뭘 하든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한편, 한번 '친구' 서클에 들어온 사람은, 무한 응원하고 신뢰해왔다. 그러다보니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혼자 속으로 바라는 어느정도의 기대치가 있어왔다. 그런데 상호관계로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 몇 명에게 크게 실망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큰 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서 실망이 너무나도 컸고, 혼자 상처도 크게 받았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상처로 인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 '친구'에 대한 기대치도 낮추기 시작했다. 아직 기대치가 높았을 때는 계속되는 상처에 힘들었는데, 혼자서 그 '친구'를 포기하고 나니까, 별거 아니더라. 애초에 내가 받아들이는 '친구'의 벽이 높았기 때문에,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로 남아야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가치관이 변하면서 나라는 사람이 달라지듯이, 원래 '친구'로 여겼던 사람을 더 이상 '친구'로 두기에 어려운 시점이 오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한 평균적 기대치가 더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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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기대치가 낮으면, 뜻밖의 작은 호의에도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고, 효율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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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마음속으로 선을 그어두고 있었던 '친구'라는 개념이 잘못되었나보다. 벽을 조금 낮추고, 경계를 유동적으로 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이 나와는 맞지 않았던 사람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