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메일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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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s thesis at CWI: meeting]  Dear Sueyoon, We enjoyed speaking with you last Friday, and we ar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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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제발, 제발.

메일 미리보기로 단어 몇 자가 보인다.

enjoyed...

happy...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 손으로 눈 앞을 살짝 가리며 메일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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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welcome you to the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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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했다. 이번 건 꼭 잘됐으면 했다.

포스트잇에 다가

'이번 졸업 연구 한 번에 결정 나서 꼭 제때 한국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쓴 후 책상 옆 창문에 붙여두었다. 포스트잇이 눈에 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지난주 금요일, 내 (예비) 슈퍼바이저와 멘토가 될 분과 면접을 봤다.

네덜란드 국립 수학 정보 과학 연구소 분들이다. 두 분 다 똑똑하고 열정적이고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포트폴리오를 마음에 들어하셨다. 연구 주제 방향성을 맞춰가는데, 모든 요소가 다 마음에 들었다. 프로젝트에 필요한 스킬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맞아떨어졌다. 이 정도면 운명이다. 좋은 신호일 거야.

그리고, 드디어 어제부로, 위의 메일과 함께 졸업 연구할 곳이 결정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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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일 년 전, 석사 자퇴를 알아봤었다. 온 지 세 달만에.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계산해봤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자퇴를 하면 당장 눈 앞에 닥치는 리스크가 컸다. 그래서 마저 학위를 마치는 대신에 힘을 빼고, 마음을 비우고 유급만 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마지막 학기 졸업 연구만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주제로 진행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VR이나 AR 관련한 프로젝트가 하고 싶었다. 이 주제로 하면 한국에 돌아가 일반 회사에 취직한다고 할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냥 너무 하고 싶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이유 없이 끌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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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부터 졸업 연구할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 관심 분야를 알던 친구가 한 연구소 VR 프로젝트 공지를 알려줬다. 오! 하고 준비해서 지원했는데 서류 탈락을 했다.

한 달 동안 더 찾아봤다. 올라오는 공지는 많은데 VR AR 관련된 디자인 쪽 프로젝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졸업 연구 시작이 늦어지면 학비도 추가로 내야 하고 기숙사 문제도 있고 골칫거리가 늘어난다. 마음은 급한데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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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어쩔 수 없이 반 포기를 하고 그나마 차선책으로 괜찮아 보이는 연구실에 지원을 했다. 포드랑 협업해서 하는 프로젝트였다. 지원 메일을 보내고 미팅을 하자는 답변이 왔다. 어, 그런데 미팅을 잡은 지 한 시간 후에 다른 연구실에서 VR 프로젝트가 떴다. 운명의 장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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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포드 프로젝트 쪽에서는 그리 급하지 않은 듯했다. 2주에 걸쳐서 내 CV와 포트폴리오를 받아갔다. 겨우겨우 미팅을 했다. 음 나름 긍정적인 거 같은데? 그리고 며칠이 지나 메일이 왔다. '미안, 너 말고 다른 애들이 우리랑 더 잘 맞을 거 같아'. 아니, 그럴 거면 왜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끄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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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랴부랴 이 주 전에 놓쳤던 다른 연구실 VR 프로젝트라도 잡아보려고 메일을 보냈다.

돌아오는 답변: '메일 보내줘서 고마워. 그런데 미안, 딱 어제 다른 학생이랑 하기로 결정 났어.' 

하루만 빨리 결정이 났으면 기회를 잡아볼 수 있었을 텐데.

이것도 운명의 장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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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일주일이 흘렀다. 어느 날 밤, 눈은 졸리고 피곤한데 자기 전에 무념무상으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내가 예전부터 팔로우하고 있던, 취미로 케익 가게를 하는 포닥 분이, '석사 졸업 연구로 VR 프로젝트 관심 있는 사람?'이라고 스토리를 올렸다. 뭐지, 내가 잘못 본건가? 다시 스토리를 확인했는데 제대로 본 게 맞았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dm을 보냈다. 답장이 왔다. 메일로 CV와 포트폴리오를 보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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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기다릴 때는 한 시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일주일 같다. 엇, 내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든다고 하신다!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다. 이번엔 진짜 잘될 거 같은 기분이 스멀스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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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나서 처음으로 케익 가게 포닥 분인 J를 만나 뵙게 되었다. 가기 전에 관련해서 ideation도 여럿 준비해 갔다. 웬일이야, 나를 너무 마음에 들어하셨다. 직접 만든 말차 케익이랑 내린 커피도 준비해주셨다. 중국분이신데 내가 한국인이라고 같은 아시아인이라고 더 좋아해 주시는 거 같았다. 방향성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하게 될 주제가 'Cake VR'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엇, 케익 만드는 건 내가 그리는 그림이 아니긴 했는데. 그래도 J분 인상이 너무 좋아 보여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주 혹시나하고, 케익 말고 내가 생각해온 아이디어가 있는데,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J가 자기 친구가 진행하고 싶어 하는 연구가 있는데 그게 너랑 더 잘 맞을 거 같다고 하며 주제를 공유해주셨다. VR 공간 상의 3D 캐릭터 관련이었다. 마음속으로 '이거다!'를 외쳤다. 나도 이 토픽이 조금 더 재미있을 거 같다고 하니, 그럼 이걸로 진행하자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멘토 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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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며칠 후 다른 분에게 또 다른 메일이 왔다. J의 동료인 A였다. J한테 너의 연락처를 전달받았다고, 나와 미팅을 하고 싶다고, CV를 보내달라고 했다. 이거 이상한데? 이미 결정 난 게 아니었나? 다시 시작인 건가?  

그렇게 A와 줌으로 미팅을 하게 되었다. 미팅 시간에 맞춰 줌을 켰는데 그 옆에 헤드 교수님인 P도 계셨다. 내 소개를 해달라고 했다. 아, 이건 또 다른 면접이었구나. 준비를 하나도 안 했는데. 큰일 났네. 그냥 J와 Cake VR 연구한다고 할걸.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횡설수설 이야기를 했다. 그날따라 영어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A와 P 교수님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어주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이 원하는 스킬과 내가 가진 것과 하나하나 다 들어맞았다. 내가 혼자 끌려서 깨작깨작 일 년 넘게 공부했던 Unity 스킬, 이번 학기에 학점 채우느라 우연히 들었던 'Design for Emotion' 수업에서 배운 지식, 코로나로 온라인 유저 테스트를 했던 경험, 학사 졸업 연구 때 징글징글하게 태워먹었던 아두이노 다루는 스킬, 그리고 작년 한 수업에서 교수님 말 안 듣고 내 고집대로 해서 AR 캐릭터로 앱 만든 경험까지. 완벽히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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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진짜로, 졸업 연구할 곳이 결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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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앞 두 졸업 연구 프로젝트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계속 VR 프로젝트만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작년에 교수님 입 맛 맞추느라 성적을 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J라는 포닥분에 관심을 가지고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지 않았더라면. J와의 미팅 때 다른 연구에 더 관심있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나에게 꼭 맞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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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necting the d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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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연결점이 없던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로 수렴하는 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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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직 연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기회가 어떤 결과를 낳을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운명처럼 느껴지지만 몇 달 후에는 또 다른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연구를 한다고 한국 회사 취업에 1도 도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신나고 떨리고 설레인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내가 연구를 진행하게 될 곳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네덜란드 국립 수학 정보과학 연구소라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된 건데, 무려 파이썬이 태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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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싶다면, 끝까지 뚝심 있게 밀어붙여야 한다.

상황이 어떻고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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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 거 같다.

 

@하루 한 편 글쓰기
2020년 11월 18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