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11월의 책,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나'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났고 비혼에 40을 넘겼다. '나'는 엄마, 그리고 가정 폭력으로 아이 둘과 집을 나온 동생과 함께 살며,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작게나마 하던 밥벌이도 그만두고 전업으로 가사 노동을 한다. 엄마는 나의 가사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며 손 까딱하지 않는다. 동생이 새로운 남자와 연애를 하고 두 아이가 안중에서 벗어나도, 자신이 자처하여 동생을 본래 남편에서 떼내왔기 때문에 뭐라 하지 못한다. '나' 또한 마음이 통하는 남자가 있지만 내가 처한 위치 때문에 관계를 이어나지 못함을 받아들인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안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맡아 썼다. 하지만 이는 가족 구성원 그 누구에게도 당연한 것일 뿐이다.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이 마음 속에서 꿈틀댄다. 하지만 동생이 집으로 들어온 3년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다. 시를 쓸 만한 마음과 시간적 여유는 온전히 내 몸뚱아리 외 네 명의 가족의 집안일을 하는데 쓰인다.

그리고 '나'는 잠시만이라도 나로 살아보겠다고 시를 쓰기로 다짐한다.

---

그래서 엄마는 동생의 새 인생을 위해서라면 아이는 우리가 맡아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선택을 하라면 나 역시 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동생이 제 삶을 살아가길 바랄 것이었다.
.
(p. 33%)

그러니까 나는 시를 쓴다는 포즈만 취해왔던 것이다. 시와 같은 편이 되거나 시와 같이 어울려야 하는데 나는 늘 속내를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멀찍이서 노려보기만 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나를 그려 넣고, 나를 새겨야 하는데 그마저도 용기 내지 못했다. 시를 쓰지도 못하면서 시 쓰기를 꿈꿨다는 건 시의 그림자에 숨어 내 언어가 사라지는 줄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
(p. 44%)

누구보다도 나는 동생의 사정을 잘 알았다. 엄만 아이들을 위해선 나의 손이 점점 더 필요해질 것도 알았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집을 나서 내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
(p. 45%)

---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K장녀 (Korea + 장녀)' 에 대한 서사라고 말한다. 

여자 한 명이 한 가정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온 우리나라의 가족 구성원의 역할 분담 구조이다. 집안일은 경제적 가치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 된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략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가족을 위해 내가 자처한 책임감은 그들이 누리는 권리가 되어 돌아온다. 안타깝게도 내가 나의 권리와 영역을 지키지 못하면 그는 끊임없이 침범당할 뿐이다. 이는 어느 집단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루 한 편 글쓰기
2020년 11월 2일, 월요일